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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C&DMC/글

[버질단테] The ONE Who Is Left Behind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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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n cocks - so cold


The One Who Is Left Behind (1/3)


: But who is that one?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 악취를 풍기는 썩은 고기의 냄새, 괴기한 모습을 지닌 것들의 조용한 잠식. 문두스가 죽은 지 1년째,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단테는 여전히 망나니처럼 살았다. 눈을 뜨면 술부터 마시고, 밤이 되면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다한들 여전히 붉게 빛나는 향락가를 맴돌며 밤을 정처없이 보냈다. 악마들은 단테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천사들은 여전히 인간들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 악마들은 있는듯 없는듯 가끔씩 인간들의 눈에 보였을 뿐, 특별한 위해를 끼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버질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던 때를 회상했다. 너를 사랑했었어, 그 한마디가 사방에서 메아리처럼 울리고, 단테는 그의 상상속에서 실망한 형의 시선을 피하며 회상을 접었다. 버질은 죽었다. 아무리 네피림이라 해도 심장을 관통 당한 상처는 회복이 되지 않는다. 악마들이 그렇듯이, 천사들이 그렇듯이.

 림보가 세계에 융합된 이후로 단테는 악몽을 꿨지만, 그의 악몽은 악마가 아니었다. 악마였던 적이 없었다. 푸른 언덕의 낙원이 빨갛게 불타오르는 지옥으로 변할 때면, 단테는 울부짖는 어린 아이들의 소리를 들었다. 너 때문이야. 하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남자가 말했다. 그는 단테의 얼굴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띄운 채 비웃었다. 네가 따라갔어야지, 네게 남은 유일한 가족을 따라갔어야지. 인간이었던 적도 없는 주제에.

 단테는 자신의 리벨리온과 어머니의 유산을 악몽 속의 그에게 빼앗긴 채 주저 앉았고, 그는, 단테가 버질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테의 가슴에 아버지의 검을 관통시켰다. 그는 비명을 지르는 단테의 목소리까지도 빼앗아 비통하게 말한다.

 ‘너는 형을 죽였어.’

 구원을 받지 못한 존재는 미련을 남겼다.



*



 “씨발.”

 머리 위로 거대한 건물이 천둥같은 소릴내며 붕괴를 시작했다. 기이한 모습의 악마들이 무수히 뛰쳐나오는 틈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단테는 침침한 하늘마저 가리며 쏟아지는 유리 파편과 물건들을 피해 움직였다. 집채만한 악마가 순식간에 인간들을 잡아채어 갈가리 찢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인간은 건물의 잔해에 깔려 살점을 튀기고, 위협적으로 돌변한 악마의 갈퀴같은 손에 피를 잃었다. 단테는 바짝 마른 입술을 윗니로 짓이기며 무너지는 건물의 그림자에서 피했다.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울부짖는 탄식이 거리를 뒤흔들었다. 악몽의 비명소리가 현실에 산재했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그러나 이미 현실 또한 악몽이었다.

 단테는 최선을 다해 그것으로부터 도망쳤다. 세계가 네 보호 아래 있다고? 현실에 나타난 환각이 자신의 목소리로 웃었다. 웃음 소리가 몸 속에 울려퍼졌다. 하나도 못구했잖아. 쏟아지는 물건들을 나는 듯이 피하던 단테는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보았다. 또 다시 허공을 울리는 비명과 웃음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위를 올려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송장의 인형같은 눈동자만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아비규환의 끝자락에서 단테는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았다. 그가 건물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간, 악마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융합된 세계는 불완전했다.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테!”

 주위에는 이미 숨을 잃은 시체와 꺼져가는 생명, 그리고 자욱한 먼지가 가득했다. 고작 한 시간도 안되어 벌어진 모든 일의 끝자락에는 결국 인간이 아닌 존재만이 남았다. 단테가 처참한 이 장소를 떠나려 마음을 먹었을 때,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캣?”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죽었잖아. 네가 버질을 죽인 그 날에.
 하얀 머리의 그가 자기 자신을 향해 비아냥댔다. 조소가 담긴 얼굴이 다시 한번 제 이름을 외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단테는 시야 언저리에 걸친 제 꿈의 환영을 무시했다. 그건 진짜 캣이었다. 많은 피가 냇물처럼 새어나오는 허리춤을 한 손으로 지혈한 채, 단테를 향해 소리치는 진짜 인간인 캣. 단테는 멍청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벌리는 캣의 얼굴이 생생하게 일그러졌다. 단테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하늘을 올려보았고, 자신을 향해 불규칙적으로 낙하하는 림보의 잔재를 마주했다. 비명과 같은 외침이 악몽과는 사뭇 다르게 허공을 갈랐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림보와의 첫 융합이 일어난 그 날의 수많은 시체들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 한 인간. 자유를 원하며, 결국 자유를 되찾은 인간. 단테는 하얀 머리의 자신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구원을 바랐다.

 “—조심해요, 단테!”

 순식간에 떨어져 내리는 잔해들을 아비터로 부수며 단테는 재빠르게 그녀를 향해 뛰었다. 1년 만에 보는 그녀는 척 보기에도 초췌했고, 뼈만 보일 정도로 말라 있었으며, 걸친 옷은 핏물에 절여진 누더기 같았다. 캣은 서둘러 부축하려는 단테를 왼손으로 막아냈다. 그녀의 손가락은 약지가 없이 네 개뿐이었다. 단테는 망연한 얼굴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캣은…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눈빛을 비추었다.

 “모든게 버질 때문이에요.”



*



 버질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스스로 마계를 향한 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내고 그가 있던 자리에서 뒤돌아섰던 날. 캣과 함께 버려진 오더의 창고로 돌아가던 단테는 분명히 문두스를 죽였을 때 사라졌던 림보의 잔상이 쏟아져내리는 것을 또다시 겪었다. 하얗게 질린 캣이 단테보다 먼저 달려나가고, 단테는 그 자리에 멈추어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보았다. 그 때 단테는 캣을 잃었다. 그녀가 지나간 뒤로 무너지는 건물들, 발 끝에 떠도는 먼지. 자욱한 연기 속에서 단테는 멍청하게 서있었다. 입술은 떨어지지 않고, 생각은 한 줄로 그어진 바이탈 사인처럼 멈췄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림보의 융합이었다. 세계는 내 보호 아래에 있어, 단테는 불과 다섯시간도 안되어 뱉어낸 말을 도로 집어넣고 싶었다. 악마들의 왕이 죽었음에도 어째서 그 길은 닫히지 않고 열렸는지.

 캣은 그 모든 일이 버질때문이라고 했다. 멀쩡한 건물로 들어온 그녀가 창틀에 걸터앉은 단테를 마주하고는, 그가 죽지 않았으며, 악마들이 그를 섬기기 시작했다고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단테는 그녀를 비웃었다. 환상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하얀 머리칼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 현실의 자신을 보며 저와 똑같은 얼굴로, 그녀를 비웃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어. 버질이 살아있다고? 넌 네 형을 죽였어. 환영은 그칠줄 모르고 떠들었다. 단테는 캣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그럴리가 없어. 우린 불사의 존재가 아니야. 고작 천사와 악마의 혼혈이라고. 악마와 천사조차 죽어. 죽으면 소멸되지. 그건 치유될 수 없어. 내가 심장을 찔렀다고.”

 “하지만, 단테. 이건 사실이에요. 나는 지난 1년동안 온갖 것을 봐왔어요. 악마들의 지도자가 새로 생겼고, 그게 버질이에요. 그는 죽지 않았어요.”

 “그를 봤어?”

 캣은 입을 다물었다. 단테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봐, 그녀는 거짓말을 한다니까. 환상의 그가 그의 옆에 서서 속삭였다. 꿈 속의 환영이 현실에 나타나 제 자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던가. 믿을 사람도 없고, 악마도 없는 삶에서 제정신인지 알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서나 존재하는 악? 문두스가 죽기 전에는 그랬다. 믿어야 할 사람들이 악마 쓰레기였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믿었던 사람들을 나락으로, 죽음으로 밀어버린 자에게 구원은 없었다. 날마다 죽어가는 인간들 사이에서 구원자도 되지 못했다. 구원을 받지도, 행하지도 못한 방관자에게 찾아온 적막은 미친 세계를 만들어냈다. 환상이 말을 걸어도 단테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머리의 자신은 이제 캣앞에서 비아냥댔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할 때 너는 왜 나를 찾지 않았어? 나를 나라고 말해줬던 너는 어디에 있었어? 그가 속삭이며 말하는 모든 것은 단테가 내뱉고 싶은 추악함이었다.
 내가 미쳐갈 때 너는 날 찾은 적도 없어. 문드러져 본래의 형체조차 찾을 수 없는 생각을 내뱉기에 단테는 그리 순진하지도, 어리지도 않았다. 제 환각이 손가락을 들이대며 캣에게 욕을 내뱉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았고, 캣은 어딘가 멍한 시선을 두고 저를 바라보지 않는 단테를 직시했다. 자신의 환각이 그녀를 저주하기 시작하자, 단테는 겨우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캣과 눈을 마주했다.

 “버질을 봤냐고 물었잖아.”

 캣은 입을 다물었고, 끝내는 고개를 저었다. 단테는 지친 얼굴로 다시 캣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창 밖에는 어떤 인간도 없었다. 그 뿐이었다.

 “이제는 이 세계가 중요하지 않은가요, 단테? 지난 1년동안 당신은 뭘 했나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지금 날 비난하려는거면, 한 번 해봐.”

 “단테! 그 누구도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요! 내 말을 좀 들어요, 나는, 나는 이 세계를 아직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당신이 보호하는 세계잖아요.”

 내가 보호하는 세계? 단테는 도화선에 불을 지핀마냥 솟구치는 분노를 겨우 삼켰다. 캣과 눈을 마주하지도 않은 채 단테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캣은 여태껏 침착했던 음성을 약간 키웠다. 단테가 듣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지난 1년간, 단테를 놓친 그 때부터 캣은 정신없는 날들을 견뎠다. 악마의 사냥개에게 왼손 약지를 잃었고, 악마들에게 걷어차인 오른쪽 다리는 걸핏하면 상처가 터져 검은색에 가까운 피가 흘렀다. 어디에서든 악마는 불타는 입을 쩍 벌리며, 얼어붙은 손아귀를 쭉 뻗으며 인간을 죽였다. 문두스가 살아있었을 때보다 상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 지옥같은 시간을 견뎌내고 얻은 정보란 그들의 새 지도자가 천사와 악마의 혼혈이라는 얘기뿐이었다. 단테, 혹은 버질. 그녀가 아는 네피림은 단 둘 뿐이었다. 현 세상에 존재하는 네피림은 단 둘 뿐이었다. 첫 붕괴는 그들의 새 지도자가 일으킨 것이 아니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캣이 단테를 오랜 시간을 돌아 찾아낸 이유는 그것 뿐이었다. 진실은 간절한 바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작은 의심, 단테가 정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그 의심, 그것은 캣이 제 생각을 전부 단테에게 털어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그는 아직 수호자여야 했다.

 마침내 단테가 다시 캣을 쳐다보았을 때, 캣은 처음으로 단테의 눈을 피했다.

 “버질이, 그가……살아있고, 지금 이 세계를 망치는 거라면,…살려두어선 안돼요.”

 또 다른 단테가, 이젠 현실의 자신을 보며 웃었다. 위선자. 역겨워 죽겠네. 명백히 그녀를 조롱하던 환각이 단테와 눈을 마주하며 그 웃는 얼굴로 토하는 시늉을 했다. 결국 단테는 그 간극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비명처럼 높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버질을 죽이려고 했어! 내 형을, 내 손으로 죽이려고 했다고! 그를 살리려고 한건 내가 아니었어. 너였지. 네가 나를 막았잖아. 지금 나보고 다시 그를 죽이란 얘기야? 나는 이미 버질이 죽었다고 생각해. 죽인 사람을 또 죽일 수는 없어! 나는 그렇게 못해.”

 참고 참았던 말을 내뱉어도 결코 후련해질 수 없었다. 결국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그대로였다. 씨근덕거리는 숨이 진정되지 않아 가라앉은 정적위에 쌓였다. 캣은 여전히 단테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형제를 죽이는 이를 막은 것이 그녀를 죄인으로 만들었던가, 해야만 했던 일을 번복하고자 하는 그녀의 신념이 그녀를 죄인으로 만들었던가. 캣은 고개를 떨군채 입을 닫았다. 후회는 시간을 떠나 늘 같은 곳에 자리잡았다.

 “나는 그 누구도 구하지 못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나는 악마를 죽이기만 할 뿐이야.”

 “단테, 당신은 나를 구했잖아요. 림보가 열릴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닫힐 수 있어요. 우리는 그 진원을 알고 있어요.”

 이제 캣은 절박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수호자, 이 세계의 구원자. 유일하게 인간도, 악마도, 천사도 아닌 선한 존재. 혼돈을 야기한 자는 둘 중 누구도 아니었으나, 그 혼돈의 책임은 둘 모두에게 쥐여졌다. 단테는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비꼬는 어투가 혀를 타고 흘러나왔다.

 “네 꼴을 봐, 캣. 난 널 구한 적이 없어. 앞으로도 난 못해. 애초에 그럴만한 재목도 아니었지.”

 “단테, 제발 내 말을 좀—”

 “나를 내버려 둬. 지난 1년간 그랬던 것처럼.”

 캣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절망만 남은 그 얼굴에 단테는 어떤 감흥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환상 속의 자신이 저를 향해 차갑게 웃을 때, 단테는 억지로 숨을 참았다. 나락보다 더 깊은 구덩이에 갇힌 그에게 내려질 구원 따위는 없었다. 해는 다시 져버렸고, 단테는 그녀를 버려진 건물에 두고 떠났다. 극적인 재회치고 잔인한 결말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



 단테는 이 곳이 꿈이라는 걸 알았다. 1년 전의 그 곳. 모든 것이 멀쩡하지 않았지만, 기뻐했던 그 때의 감정을 기억했다. 피와 탄식에 젖었던 땅을 만족스럽게 비추던 빛이 찰나에 스러지고, 단테는 피에 젖은 리벨리온을 쥐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그 하늘보다 푸른 눈동자가 저를 향했다. 그 눈이 담은 것은 증오도, 고통도 아니었다.

 “너를 사랑했었어.”

 그의 눈은 실망을 담았다. 온통 실망의 색으로 가득찼다. 그의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회색빛이었다. 단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시선이 쇠사슬이라도 되는 양,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도록 몸을 죄었다. 겨우 목을 쥐어짜내어 단테가 내뱉은 말은 고작, '왜,' 한마디였다. 왜 너는 내게 그런 말을 남겼어. 내가 널 원망하는 것처럼, 너도 날 원망해? 왜 넌 그런 모습을 내게 보여주지 않은거야. 정작 묻고 싶은 말은 문장이 되지 못했다.
 버질은 그 짧은 물음에 들은 척도 없이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고작 두 걸음 만에 버질은 마치 림보의 출구처럼 단테에게서 멀어졌다. 단테는 자유롭게 풀려난 제 몸을 움직였다. 버질이 제 검을 꺼내어 허공에 휘두르고, 그 장면은 누군가 일부러 속도를 늦추는 장난을 부린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단테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그보다 더한 충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버질의 옷자락이 겨우 내뻗은 손끝에 닿을 때쯤 그는 사라졌다.
 암흑, 다시 점화. 어둠이 사라진 그 앞엔 하얀 머리의 자신이 있었다.

 ‘잡아야 했어.’

 단테는 제 앞의 자신을 보다,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마치 자신의 형제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단테는 1년 전 캣을 놓치고 난 이후 서서히 본래의 색을 되찾아 검은 머리카락으로 돌아온 자신을 보며……울었다.
 따라 갔어야지, 네가 그를 잡았어야지. 서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단테는 또 다시 자신의 환영에게 목소리를 빼앗겼다. 하얀 머리의 자신이 속삭였다.

 ‘나는 단지 나를…….’

 단테가 스스로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 땅이 꺼졌다. 수없이 반복되는 악몽의 시작.

 단테는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에 압도되었다. 실망에 가득찬 그 눈이 수십, 수백 번 저를 박살냈다. 차라리 그 눈에 증오가 있었기를 바랐다. 꿈 속에서도 자신의 형은 결코 그가 바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자신을 사랑했다고 외쳤다.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목소리.

 ‘너를 사랑했었어.’

 숨 막히는 악몽의 서막은 그를 옭아매는 눈동자였다. 우스운 진실은, 이 생생한 기억을 그가 따로 회상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아직도 멈춘 시간이었다. 여전히 진행중인 시간. 그 짧은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었다.
 때때로 현실에서 단테는 이 시간을 끄집어냈으나, 그건 스스로 여닫을 수 있는 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악몽은, 그가 원한다고 해서 끝이 나진 않았다. 버질은 죽었다. 버질은 살아있다. 두 개의 상충된 생각이 끝도 없이 부딪혔다. 더 이상 왜 라는 물음은 의미가 없었다. 그건 단테가 그에게서 들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다만 바뀐 질문의 답은 존재했다. 이제는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 질문이었다.

 “이미 늦었어?”

 악몽 속의 형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테는 뜨겁게 목을 메이는 숨을 뱉어냈다.

 “그래, 늦었어.”

 눈동자가 모든 하늘을 메우고, 곧 그의 존재마저 사라지면 단테는 자신의 파란 낙원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청량한 하늘과 바람에 흩어지는 들판. 그의 파란 낙원이 순식간에 붉은 지옥의 경계로 바뀌면, 창공을 가르는 비명소리가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그 비명소리의 진원은 사실 그의 어린 시절을 맡긴 고아원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였다. 누구 하나 믿을 이 없는 그곳의 아이들. 단테가 믿어야할 사람은 애초부터 단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밖엔 없었다. 왜 나를 그렇게 늦게 찾았어? 그의 원망은 사실 터무니 없는 바람이었다. 여전히 형제의 탓이기를 바라는 원망과 조금 더 빨리 자신을 찾아주기를 원하는 소망. 진실은, 그 어느것도 형제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거듭된 악몽으로 으스러진 감정들은 잡을 틈도 없이 흩어졌다. 단단하게 뭉쳐진, 타오르는 원망이 일시에 저를 향해 파고들었다.


 단테는 저를 잡아채는 현실을 느꼈다. 아니, 그건 현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모든 악몽의 시작은 그 파란 눈동자였다. 제 눈동자보다도 훨씬 푸른 그 눈동자는 끝없는 실망을 두고 그를 괴롭혔다. 단테는 그리 어둡지 않은 곳에서 눈을 떴고 저와 마주하는 파란 눈동자를 발견했다.

 “단테.”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저를 향해 불렀던 형의 목소리가 늘 이랬던가? 단테는 여전히 꿈도 현실도 구분할 수 없는 먹먹함에 젖어 있었다. 이미 버려져 황폐해진 오더의 창고. 정처없이 헤매던 단테는 캣과 헤어진 날부터 버릇처럼 일주일에 한번쯤은 오더에 들려 제 형제가 썼던 방에 들어와 잠을 청했고, 열에 아홉번은 악몽을 꾸었다. 캣을 뒤로 한 단테가 들어온 곳은 또다시 오더의 창고에 마련된 형제의 방이었다. 단테는 침대에 푹 파묻힌 채 제게 고개를 숙인 버질과 눈을 마주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손가락이 차게 식은 뺨을 쓸었다. 버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조소에 가까운 미소였지만, 단테는 그 표정이 꿈에서 보지 못한 얼굴이라는 걸 깨달았다. 버질은 천천히 몸을 숙였고, 뺨을 쓸어내리던 손으로 단테의 목을 쥐었다. 단테는 눈을 크게 떴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단단해졌다.

 “보고 싶었어, 단테.”

 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단테는 굳어버린 몸을 겨우 움직여 제 목을 조이는 손을 손톱으로 긁었다. 컥컥, 겨우 공기가 기도로 넘어가는 숨소리가 울렸다. 버질의 얼굴에선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단테는 버질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눈물 때문에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에서도 단테는 버질을 필사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뜨거운 물방울들이 귓바퀴에 고여들었다. 단테는 말을 하려고 했다. 숨이 넘어가려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어했다. 버질은 단테가, 원한다면 언제고 저를 쳐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저항은 소극적이었다. 림보는 이 세계에 비친다. 그의 총, 에보니와 아이보리를 사용하거나, 하다못해 발버둥을 친다면 버질은 미련없이 그를 찌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목을 조르는 손을 고작 제 손으로 떼어내려고 하는 것이 그의 반항이었다. ‘단테가 무력하다.’ 버질은 굳은 얼굴로 힘을 조금 풀었다. 단테는 금방 기침을 하며 방금전까지 할퀴고 있던 버질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정말, 이미…이미 너무 늦었어?”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다 갈라지고 막힌 소리가 났다. 버질은 단테의 시선을 마주하며 잠시 모든 생각을 멈추었다. 늦었냐고? 버질은 단테의 물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잘도 돌아가던 머리가 낡은 시계태엽이라도 된듯 버겁게 단테의 말을 따라갔다. 버질은 무심결에 혀에 맴도는 말을 꺼냈다.

 “아니,”

 버질은 제가 뱉어낸 말에 놀라 화들짝 제 손을 단테의 목에서 떼어냈다. 단테는 뒷걸음질을 치는 버질을 따라가려 몸을 일으켰다. 단테는 이 곳이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그의 세상에서 버질은 죽은 게 아니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버질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제 말을 허공에 흩뿌렸다. 이미 수백, 수천 번동안 겪은 단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으나, 무력하게 매달리는 단테는 그 중에 없었다. 기억할 수도 없을만큼 죽였던 제 동생의 환영들이 멀어지고, 그 앞엔 진짜 단테가 남았다.

 “내가 너를…따르게 해줘.”

 단테는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어린 애처럼 두 팔을 뻗었다. 버질은 기억을 잃기 전의 어린 단테가 종종 제게 팔을 벌리며 딴청을 피우던 모습을 떠올렸다. 버질은 천천히 단테에게 다가갔다. 작은 머리를 감싸고 제 품에 안아주자, 단테는 버질을 끌어안았다. 동생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나는 단지 나를 구해줄 사람이 필요했어.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들려오는 말이라곤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