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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C&DMC/글

[버질단테] 사랑을 했다. 2








사랑을 했다



* 현대au
* Bgm - Chopin, Raindrop prelude.
& Mozart, Turkish march.








​이미 한 번 사랑했던 사람과 다시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을 무엇으로 일컬어야 하나.





단테는 성당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 라미아 고아원은 고아들을 데리고 일요일마다 성당을 들려 찬송가를 부르도록 시켰다. 너희들이 입양되려면 주님을 믿어야 한단다. 아직 어린 코흘리개들을 데리고 고아원의 수녀는 매번 그렇게 말했다. 단테도 한 번쯤은 그 말을 믿었다. 고작 8살짜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족이라고 세뇌시키던 고아원의 수녀와 성당 사람들. 교회에는 오르간도 있었고, 피아노도 있었다. 어색한 손짓으로 도부터 솔까지 음을 내면, 성당에서 이따금 반주를 치는 고아원의 제법 나이 많은 여자아이가 들으라는 듯 멜로디를 쳐주었다. 단테가 익힐 때까지 몇 번이나 치고 나면, 그녀는 그녀를 부르는 신부를 따라 작은 기도실로 들어가야했다. 어렸지만 결코 어리지 않았던 단테는 그 일을 모른 척했다. 아는 척을 해봐야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따귀를 맞거나, 입을 다물라고 눈치를 주는 신부의 감시밖에 없었다. 단테는 피아노를 쳤고, 사건의 방관자가 되었다. 작은 기도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으나, 단테는 부러 아량을 베풀어 그녀가 나올 때까지 그 멜로디를 쳤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그 멜로디에 가사가 있다는 것을 안 때는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였다.

이따금 고아원의 아이들은 홍등가에 팔리듯 떠나가기도 했다. 얼굴이 조금 예쁘거나 귀여운 아이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고아원에서 나가게 됐다. 유감스럽게도 단테 또한 그런 순간이 있었다. 11살의 단테에게 막대사탕을 쥐여주며, 함께 가지 않으련,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고 요사스러운 화장을 치덕치덕 바른 채 미소를 짓는 중년의 여자. 그 때 단테는 일요일이면 성가대의 반주를 맡았다. 단테에게 청량한 피아노 소리를 들려주던 여자아이가 17살이 되어 모든 일을 들키고 고아원 원장 수녀에게 뺨을 맞은 뒤 사창가에 팔리듯 떠넘겨졌을 적부터. 그녀는 이따금 그녀가 사랑하던 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들렸다. 늘 기분이 안 좋은 수녀 몰래 그녀가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쥐여주었다. 착한 그녀는 단테를 잡고 있는 그녀의 사장을 향해 단테가 듣도 보도 못한 욕을 하며 떨어뜨려놨고, 중년의 여자는 아쉬운 얼굴로 순순히 물러났다. 가슴은 훅 파이고, 허벅지 반을 간신히 가리는 옷을 입은 그녀. 멀뚱멀뚱 서있는 단테를 등지고 앞에 선 그녀는 그녀의 일생에 단 한 번, 작은 아이를 위해 큰소리를 냈다.
단테, 너는 꼭 피아노를 쳤으면 좋겠어. 단테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는 여전히 그녀보다 작고 깡마른 단테를 위해 몸을 굽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누구보다 선했던 그녀는 단테가 14살이 된 해, 21살의 나이에 자살했다.

울었나, 울지 않았나. 단테는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단테는 13살이 되어서야 늦은 입양이 결정되었고, 14살이 거의 끝나갈 때 다시 고아원에 돌아왔다. 10월 중순부터 3월까지 반년동안 질리도록 비가 내리는 장미의 도시. 날이 어두워진 12월의 저녁, 흔적만 엉성히 남은 장미 정원이 끝없이 펼쳐진 고아원의 문을 다시 열고 들어온 사람은 쏟아지는 가랑비를 맞고 파랗게 질린 입술을 한 단테였다. 단테는 일절 입양된 가정에서의 말은 꺼내지 않았고, 그저 다시 성당에서 피아노를 쳤다. 성당에는 정해진 반주자가 없었고, 단테는 악보없이도 찬송가를 외우고 칠 수 있는 유일한 고아였다.

공립학교에 다니며 단테는 허가만 있다면 음악실의 피아노를 마음껏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은 다행히도 단테를 좋아했다. 60살을 훌쩍 넘긴 여선생은 학생들에게 별로 존중받지는 않았으나 조용한 사람이었다. 단테, 너는 마치 피아노를 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 같구나. 그녀는 이따금 차분한 목소리로 단테를 칭찬했다. 단테의 재능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악보를 가르쳐주고 클래식의 거장들을 알려주는 것 뿐이었다. 단테는 그녀가 설명을 시작하면 반쯤 졸거나 딴 생각을 했으나, 그녀가 악보를 가르쳐주고, 피아노를 칠 때면 흥미가 돋은 얼굴로 그것을 따라 그리거나 그 음률을 듣고는 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루트비히 판 베토벤, 클로드 아실 드뷔시……. 그녀는 인상파 음악을 선호했지만, 단테는 고전주의 음악을 더 좋아했다. 균형이 이루어진 화음, 누구에게나 익숙한 선율, 자연스러운 가락. 나이가 들 수록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인생과는 다르게 그런 것들이 썩 마음에 들었다. 단테는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학교를 다니다시피 했고, 성적은 늘 같은 선에 남았다. 누구의 사이에도 끼지 않고, 누구의 틈에 섞이지도 않은 채 단테는 16살이 되었다. 2년이면 성인이 되는 고아원의 머리 굵은 아이들 틈에서, 단테는 아직까지도 할 일을 찾지 못한 채 남겨진 어중이떠중이였다. 수녀들은 눈치를 줬고, 다른 아이들은 부산스럽게 일자리를 구하거나 후원자를 구했다. 그 언저리에서 단테는 침묵을 유지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날. 늘 똑같은 일요일, 같은 찬송가. 비가 추적추적 내려 우울한 어두움을 간직한 새벽 4시부터 성당에 불려온 단테는 의미없는 음률을 쳐내고 있었다. 사람이 비워지는 기도와 기도 사이의 시간. 찬송가가 끝나고, 신부의 기도가 끝나고, 썰물이 빠지듯 밀려나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남으면, 단테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 연주용 의자에 앉았다. 오래된 피아노는 가끔 원음과 다른 소리를 냈지만, 벌써 8년째 성당의 피아노를 쳐왔던 단테는 그 미세한 차이조차 기억했다. 성 암브로지우스의 곡들이 지겨워진 단테는 제 장난감같은 피아노를 두고 이제는 세상을 등진 여선생이 악보를 넘기며 알려줬던 곡을 쳤다. 그녀는 인상파 음악을 더 사랑했지만, 음악가로서는 쇼팽을 가장 좋아했다. 빗방울 전주곡이 그녀를 위한 애도의 곡이었다.

차분한 곡이 낮은 음과 높은 음의 화음으로 섞이고 비극적인 선율로 바뀌며 커질 때, 단테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대부분 빠져나가 비어있는 의자들 사이에서 저를 바라보는 남자. 저와 비슷한 또래인 듯 어린 얼굴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테는 저도 모르게 곡을 반박자 놓쳤고, 그만 손을 멈추어버렸다. 뒷목이 화끈거림을 동반하며 달아올랐고 단테는 다시 고개를 피아노로 고정시켰지만 멈춘 손가락은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1분동안, 단테는 멍청하게 피아노만 바라보던 자신을 추스렸다. 받침대 위에 흩어져 있던 악보를 정리하며 의자에서 일어났고, 강단을 비껴 내려왔다. 남자가 앉았던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지나쳤다. 왜 부끄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거리가 멀어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선만큼은 강렬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단 둘만 남은 것처럼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그렇게 노골적일 수가 없었다. 단테는 원체 빠른 발걸음을 거의 뛰듯이 걸어가며, 성당문을 나섰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렸다. 단테는 품 안에 든 악보를 보며 고민했다. 가져 온 우산은 있었지만 그건 성당 안에 있었다. 남자와 마주치지 않으려 그렇게 빨리 빠져나와 놓고, 다시 그걸 찾으러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망할 비 같으니, 왜 맨날 내리고 난리야. 일년의 반이 우중충한 비내리는 날씨인 곳에서 벌써 16년을 살았으면서도 단테는 하늘에 대고 욕을 했다. 악보가 젖으면 더 이상 단테에게 호의로 악보를 줄 사람은 없었다. 이미 전부 외웠지만, 단테는 틈만 나면 악보를 보곤 했다. 제게 닿은 몇 없는 친절함을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내버리기는 싫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단테가 성당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 돌아섰고, 제 앞에 선 사람과 마주쳤다.

"이걸 두고 간 것 같아서."

남자의 손에는 제 우산이 들려있었다. 단테는 낡은 제 우산을 거의 낚아채듯 잡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테가 우산을 쥔 채 머뭇거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좋아하는 곡이야?"

단테는 고개를 저었다. 당황해서 떨어지지 않았던 입술이 겨우 열렸다.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곡……. 그는 보기 드문 하얀 머리를 흔들며 걱정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유감이야. 잘 배우고 자란 아이처럼, 유감스럽다고 말하는 다정한 어투와 누구나 호감을 품을만한 다정한 미소가 지어지자, 단테는 이제 고개도 들지 못했다. 낯선 사람의 호의는 늘 불편했다. 그것보다 더 불편한 것은 규칙적이지 못한 제 심장소리였다.

"아름다운 연주였어. 중간에 끊기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고마워."

단테는 겨우, 아주 힘들게, 평이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익숙하게 다가왔지만 그는 여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단테가 다시 돌아서려고 할 때, 그가 말을 걸었다.

"나도 피아노를 치지만, 네가 치는 걸 더 듣고싶어. 우리 집에 피아노가 있는데, 괜찮다면 가지 않을래?"

그는 가볍게 단테의 팔을 잡았다가, 제 행동에 놀란 것처럼 다시 팔을 놓았다. 무작정 단테의 팔을 잡는 것이 그에게는 퍽 무례한 행동인 모양이었다. 정작 단테는 잠깐 닿았다 떨어진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정갈하고 깨끗한 손. 저와 별로 다를 것없는 손이었으나 왜 그리 눈에 띄는지. 단테는 상념을 접고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가 평생 배운 예의를 잠시 잊을 정도로 청하는 것은 집에 있는 피아노를 쳐보지 않겠냐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제안이었다.

단테는 성당의 피아노와 학교의 피아노가 아닌 피아노는 쳐본 적이 없었다. 어색함이나 민망함보다 호기심이 불쑥 솟아 올랐다.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검은색 장우산을 폈다. 둘이 쓰기에도 넉넉한 크기였다. 그는 단테가 제 우산을 어물쩡하게 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철로 만들어진 대는 휘어지고, 우산을 평평하게 고정시키는 부속품이 떨어진 부분은 말려올라가 형편없었다. 그는 선뜻 제 우산 아래 들어오라는 듯 옆으로 비껴나와 우산 손잡이를 감아쥐었으나, 단테는 꿋꿋이 제 우산을 썼다. 먼저 계단을 내려가며 단테는 흘깃 그를 돌아보았고, 여전히 입가에 웃음이 걸린 채 그는 단테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부슬비가 내리는 길을 걸으며 단테는 그가 묻는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결국 30분 남짓한 거리를 걸으며 남은 대화라고는 버질, 그의 이름과 단테, 자신의 이름 뿐이었다.



큰 저택의 가장 안쪽, 외따로 떨어져 피아노만 남겨진 방. 그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단테는 그 피아노가 그의 전용 피아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버질은 자연스럽게 연주용 의자를 열어 악보들을 꺼냈다. 단테에게도 익숙해진 이름들이 스쳐지나갔다. 쇼팽의 곡을 더 쳐줄 수 있겠어? 버질은 악보와 책들을 뒤적이며 물었고, 단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다 뒤늦게 어, 하는 짧은 대답을 했다.

"나는 낭만주의 음악을 좋아해. 특히 쇼팽을."

살아있을 때는 낭만주의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버질이 덧붙이는 말에 단테는 그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가르치던 걸 조금 귀담아 들을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단테는 받침대에 악보를 올려놓다가 멈칫하는 버질을 보았다. 곧 버질이 몸을 바로 세우며 단테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단테는 그의 입술이 벌어지는 걸 묵묵히 쳐다봤다.

"빗방울 전주곡은 이미 외우고 있던 것 같던데."

"나쁘지 않은 곡이니까."

"쇼팽을 별로 안좋아하는구나."

"나는…모차르트를 더 좋아해."

버질은 미소를 지었다.

"오, 고전주의. 그것도 좋지. 하지만 오늘은 쇼팽을 부탁해도 될까?"

단테는 옆으로 비켜난 버질이 과장된 손짓으로 피아노를 향해 손짓하는 것을 보며 입꼬리에 웃음을 매달았다. 단테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피아노에 손을 올렸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천천히 건반을 누른 단테는 피아노가 각별히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아노의 가격이 비싸다는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가게 앞을 지나다니며 몇 번 스치듯 보기만 했을 뿐 건반을 눌러본 적도 없었기에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해 명확한 구분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피아노는 눌리는 느낌도, 눌렀을 때 들리는 피아노의 음도 정확했다. 값이 꽤나 나가는 피아노임이 자명했다. 버질은 뒤로 물러나 단테를 관망했고, 단테는 흘깃 뒤를 돌아보며 버질의 눈치를 살폈다. 네 선율을 들려줘. 버질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고, 단테는 버릇처럼 허리를 곧게 세우며 건반에 손가락을 올렸다. 빗방울 전주곡. 끝나지 못한 곡을, 이번엔 제대로 끝마쳤다.


곡을 끝내고 나서야 단테는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테, 너는 꼭 피아노를 쳤으면 해. 단테, 너는 마치 피아노를 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 같구나. 두 명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단테에게 대가없는 호의를 베푼 사람은 세상에 단 둘 뿐이었다. 단테는 코를 훌쩍거렸고, 연주가 끝나서도 가만히 음률을 되새기고 있던 버질이 어깨를 들썩이는 단테의 뒷모습을 보곤 놀라서 다가왔다. 단테.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속삭인 버질이 의자에 걸터 앉았고, 단테는 건반에서 손을 떼고 제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손등 위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완벽했어."

조용히 속삭인 버질이 단테의 등에 손을 얹고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며 위로했고, 단테는 저를 바라보는 버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미끄러진 어린 얼굴, 뺨에는 쉴새없이 눈물 자국이 그어졌다. 숨을 내쉬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잠시 그를 바라보며 굳어있던 버질은 가만히 제 손을 들어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을 쥐었다. 엄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버질이 다시 한번 속삭였다. 진심이야. 단테가 눈을 감으며 버질의 손에 기대었고, 버질은 작은 머리통을 부드럽게 끌어와 제 어깨에 안았다. 왜 내가 널 이제야 만났는지 모르겠어. 네 연주를 조금 더 일찍 들었다면 좋았을텐데. 버질은 여전히 단테의 등을 토닥이며 중얼거렸고, 단테는 너른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등을 그러안았다.





*







벌써 17살이 되기까지 고작 일주일을 앞두고 있었다. 고아원에서는 자주 사라지는 단테에게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테는 부지런할 정도로 버질의 집에 들렸고, 매번 그의 피아노를 빌려 쳤다. 연인이 되기까지 6개월, 그리고 서로의 연인이 된지 이틀만에 버질은 연주를 하던 단테의 허리를 뒤에서 덮치듯 끌어안아 제법 근육이 붙은 단테의 어깨를 깨물었고, 단테는 연주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좋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버질이 속삭이는 소리에 단테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후로도 매번 단테가 두어곡을 치고나면 끌어안아대는 통에 단테는 연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나 이것만 치고. 이것만. 헐렁한 티셔츠 아래로 허리를 쓰다듬는 손을 무시하며 입으로는 계속 그를 저지하던 단테는 결국 가슴까지 쓸어올리는 손에 기분좋은 소름이 돋아 연주를 멈췄다. 아, 나 진짜 이것만 치고……. 단테가 억지로 그의 손을 끌어내리며 버질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버질은 기다렸다는 듯이 키스를 했다. 허탕만 치는 날이 늘게 되었다.

새벽내내 잠도 안재우고 열심히 쾌락을 쫓게 만들던 장본인이 자고 있는 아침이었다. 단테는 제 몸을 끌어안은 손을 치워내고 산란하게 널려진 옷에 제 몸을 꿰었다. 대충 신발을 구겨 신으며, 단테는 그의 옆방에 마련된 피아노를 향했다. 단테는 이따금 버질이 치는 피아노 연주를 감상했지만, 그는 단테가 있을 때는 생각보다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다. 네가 있으면 집중이 안되는걸, 너랑 섹스하고 싶어서. 진지하게 경청하던 단테가 질색하는 얼굴로 그를 밀어내면 버질은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아침을 만끽한 단테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나른하게 기지개를 피고 나서, 건반에 손을 올렸다. 다소 빠른 음들이 흘러나와 단테가 좋아하는 선율을 만들어냈다.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라. 날 깨우려고 작정을 했네."

"어, 음…잘 잤어?"

"상당히. 네가 맨날 옆에서 같이 잤으면 좋겠다.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하나?"

"아침부터 헛소리하네."

단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피아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낯부끄럽지도 않은지 버질은 계속 말을 이었다.

"모차르트가 살아난다고 해도 나는 널 택할거야."

"눈물나게 고맙지만, 나는 모차르트를 택할래."

"진짜?"

"……죽은 지가 몇 년인데 어떻게 살아서 돌아오겠어."

갑자기 진지해진 버질의 어조에 머뭇거리며 대답을 찾던 단테가 결국 입을 열었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울리는 웃음소리에 곧 입술을 비죽이며 의미없는 가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버질은 단테가 피아노를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침내 손을 떼고 돌아보는 단테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네가 쇼팽의 곡을 치지 않았어도 난 네게 반했겠지만, 네가 쇼팽의 곡을 친걸 보면 우린 운명이었나봐."

"너 가끔 이럴 때마다 나 닭살돋아서 죽겠어."

"아침부터 네 연주를 들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네가 참도록 해."

단테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버질은 씩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어지는 선율을 감상했다. 가벼운 아침 햇살이 들어와 단테를 비추었다.





​우연이라던가, 필연이라던가. 쏟아지는 비도 잠재우지 못한 피아노 소리가 영원히 멈추지 않았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