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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C&DMC/글

[버질단테] 사랑을 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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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했다



* 현대au
* Bgm - ikon, 사랑을 했다.












​이전처럼, 아무것도 아닌 날일줄 알았던 그 날은 빗소리가 담긴 음악에 젖어들었다.





진흙탕에서 마구 튀긴 비에 젖은 바짓단을 괜히 한번 훑어본 단테는 창밖으로 스쳐지나는 풍경을 쳐다봤다. 옆에 서있는 그의 동료는 지긋지긋한 날씨라며 혼잣말을 흘렸고, 단테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사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빗방울의 줄기가 많이 옅어졌다.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헐값에 사들인 칙칙한 색의 야상은 벌써 끄트머리가 해져 실밥이 너덜거렸다. 자켓의 끝단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단우산으로 시선을 옮겨 흘깃 내려보다, 단테는 다시 버스의 창을 마주보았다. 이번에는 풍경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남보듯 구경했다. 젖살이 완전히 빠진 얼굴은 몇 년 전보다 훨씬 날렵했다. 마찬가지로 챙의 끝이 해진 낡은 야구모자는 아직도 그에게 잘 어울렸다. 작은 종이와 우산을 헐겁게 쥔 손은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오랜 시간이라면 오랜 시간을, 건반을 두드리던 손가락은 아직도 그 감을 기억하는 것처럼 리듬을 타며 종이를 툭툭, 두드렸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낡은 운동화, 오래된 청바지, 커피얼룩이 지워지다 만 눅눅한 셔츠. 구겨진 종이조차 볼품없이 젖고 찢어져 너덜너덜했다. 키보드 연주자 구함. 시급 17달러, 저녁 11시부터 새벽 3시까지. 짧고 간결하게 적인 구인안내문과 그 아래 적혀진 주소는 허름한 그의 아파트에서 가까웠다.

너, 피아노 쳤던적 있었다고 했지. 여기 시급도 괜찮은데. 한 번 해보는게 어때? 동료가 눈앞으로 들이대는 종이를 바라보던 단테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덥썩 그의 손에 종이를 쥐여주었다. 평이한 어조가 이어졌다. 내 애인이 운영하는 클럽이야. 작은 가게지만 할만해. 네 재주가 아깝잖아. 레스토랑은 10시에 끝나니까 가기도 수월해. 게다가 여기 사장은 아무리 봐줘도 존나 악랄한 것 같다고. 그녀는 단테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허리에 두른 검고 허름한 앞치마에서 그녀의 낡은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애인에게 전화했다. 캣, 나 일 거의 끝났어. 오늘 반주자 데리고 들를게. 응, 이따 봐. 본래 털털하고 잔소리가 없는 그녀답게 전화는 금방 끝났고, 단테는 답답하게 제 목을 감싸는 흰 유니폼의 단추를 풀렀다. 쓰고 있던 우산을 대충 접으며 그녀는 피우던 담배를 레스토랑 뒷골목 길바닥에 튕겨냈다. 오늘 끝나고 일 없지? 이미 약속을 정해놓고는 형식상의 질문을 건넨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단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뒷문으로 사라졌다. 입에 가져다 댈 일 없이 반이나 혼자 타버린 담배를 바닥으로 던지며, 단테는 약간 젖은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건반을 두드리던 때가 마치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아득했다. 희미한 골목의 불빛 아래 가는 빗줄기가 끝없이 쏟아졌다.

옅은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클럽의 작은 입구를 지나치면, 좁은 계단에 엉겨붙은 어린 커플이 있었고 술에 흥청망청 취한 여자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밴드 보컬이 철지난 팝송을 반주도 없이 연습하고, 테이블의 몇몇 사람은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음미한다. 단테의 동료, 리사는 길이 익숙하지 않은 단테보다 먼저 길을 찾아 들어갔다. 단테는 비에 약간 젖은 어깨를 털고 머리를 감싸던 모자를 벗어 야상 주머니에 대충 구겨넣었다.

"캣, 얘가 그 반주자."

긴 금발을 단조롭게 묶은 뒷통수가 옆으로 비켜나자 그녀보다 조금 더 작은 흑발의 여자가 드러났다. 클럽의 주인치고는 어린 얼굴이었으나, 그녀는 그녀의 애인과 짧은 키스를 나누고 단테와 마주했다. 무관심한 얼굴을 딱히 숨기지 않는 단테를 보며 캣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반가워. 나는 캣. 리사한테 얘기 들었어."

"단테."

"시급은 17달러야. 시간은 11시부터 3시고. 피아노를 쳤던 적이 있다고 들었어. 아직도 악보는 읽을 수 있겠지?"

"아마도."

캣은 고개를 끄덕였고, 리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원래 반항기가 넘치는 놈이라며 농담섞인 첨언을 했다. 캣은 그녀의 애인과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고, 단테는 느리게 좁은 클럽을 훑었다. 사람은 얼마 없었다. 어이. 리사가 단테를 불렀고, 단테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캣이 손을 내밀었다. 단테도 손을 내밀어 맞잡았고, 두어번 흔들린 손은 금방 떨어졌다. 단테는 지긋이 제 손을 바라보는 캣을 눈치채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불쑥 말을 꺼냈다.

"시급이 왜 그렇게 높은지 물어도 되나?"

"내가 네 재능을 잠시 사는거니까. 그러니까 값을 쳐줘야지. 가격이 부담스러우면 말해, 나야 좋지."

단테는 무슨 소릴 하냐는듯 캣을 쳐다보았고, 캣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너무 진심을 말하지 말라고 놀리며 털털하게 웃는 그녀의 애인과 함께, 캣이 스테이지로 몸을 틀며 말을 흘렸다.

"일단 실력부터 구경해볼까."




오랜만에 눌리는 건반은 전자키보드답게 무겁게 눌리는 느낌은 없었다. 단테는 가볍게 낮은 도부터 높은 도까지 매끄럽게 손을 움직였고, 리사는 아는 곡이나 쳐보라며 옆에서 그를 부추겼다. 단테는 대답없이 하얀색과 검은색이 단정히 놓인 키보드를 눌렀다. 익숙한 동요의 음절이 흘러나왔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리사가 힘주어 단테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고, 단테는 제 어깨를 문지르며 그녀를 곱지 않은 눈으로 흘겼다. 면접인데 똑바로 안할래. 으름장을 놓듯 그녀가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고, 단테는 인상을 찌푸리며 들은척 만척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키보드로 고개를 내린 단테는 천천히 제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자주 트는 팝송의 가락을 쳐냈다.

"뭐야, 피아노 그만둔지 오래됐다면서. 악보도 없는데 그걸 쳐?"

리사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이번엔 단테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겨울 정도로 들었으니까. 그리고 난 악보 없이도 잘해. 약간의 거만함이 담긴 대답을 듣던 리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캣을 향해 눈짓을 했다. 재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합격점이지. 리사가 중얼거리는 말에 단테가 피식, 새어나가는 소릴내며 웃었고, 캣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당장 가능할까? 스페셜 게스트가 오거든. 내가 이 클럽을 운영하는데 도움을 줬던 사람이라서."

"안될 것 없지."



클럽은 자정이 넘어서야 사람이 많아졌다. 곳곳이 들어차는 사람들은 바에 기대 있기도 했고,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앉아 있기도 했다. 그 틈에서도 구석진 곳의 테이블에는 끝까지 예약석이라는 단조로운 판 하나가 달랑 올려져 있어 아무도 그 자리는 앉지 않았다. 단테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기타리스트 겸 보컬은 잘 부탁한다며 웃어보였고, 단테의 맞은편 스테이지에 있는 드러머는 스틱을 서로 맞부딪히며 인사했다. 단테는 악보 몇 장을 훑었다. 전부 단테가 길거리를 지나다니며 들었던 곡들이었다. 단테가 시험삼아 몇 곡을 치는 동안 사람은 계속해서 들어찼다.

작은 가게라더니. 단테가 바 안쪽에서 장난을 치는 제 동료와 클럽의 주인을 잠시 쳐다보았다. 새벽 한 시가 되었고, 이제부터 클라이맥스라 외치는 보컬이 단테와 드러머에게 손짓을 했다. 단테는 그들을 따라 작게 웃었다. 부러 피아노를 멀리한 적은 없었지만, 단테는 근 3년을 치지 않았던 건반을 다시 제 손으로 친다는 사실에 약간 기분이 들뜬 상태였다. 밝은 사랑 노래가 흘러 나오는 키보드, 그리고 그 이전에 쳤던 가락들. 단테가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띄우고 곡을 끝내며 고개를 들었을 때, 끝까지 비워졌던 좌석에 앉은 남자와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태껏 단테를 보고 있었다는 듯 턱을 괴고 있었고, 단테는 미소지었던 얼굴을 다시 키보드로 끌어내리며 그의 시선에서 숨었다. 물 좀 마시고 오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보컬이 스테이지 뒤로 걸어나갔고, 단테는 방금 전까지는 흥분에 뛰다, 이제는 다른 감정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스테이지를 떠났다. 스테이지를 내려와서는 캣과 리사가 함께 있는 바로 걸어가 높은 의자에 걸터 앉은 단테는 다시금 구석진 테이블에 시선을 주었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웃고 떠드는 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단테는 맥주를 시키려고 했다. 단테가 영 딴 세상에 머무른 둘을 향해 입술을 열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들었다.

"안녕."

오랜만에 보는 그 눈이 반으로 접혀 웃고 있었다. 저 눈을 그리워한 적이 있었나. 단테는 피아노를 놓으며 그에 대한 미련도 없앴다. 자연스럽게 식어 멀어진 이별에 길들이듯 남긴 추억이 다시 손에 잡히면, 남는 건 순수히 아름다웠던 순간인가, 지극히 쓰라렸던 순간인가. 단테는 자연스럽게 손을 얽는 그의 다정함이 그리웠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 같은 침대에 누워 코끝을 맞닿으며 웃었던 옛날의 일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헤어지고나서 겪였던 일들이 모두 우울한 것도 아니었고, 모두 슬픈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멀어진 그 이별을 아름다운 이별이라 스스로 말했다. 깔끔하게 끝난 관계를 이제와서 돌아보자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을 무시해왔다. 단테는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고, 버질도 마찬가지였다. 빈틈없이 매끄러운 편안함. 3년의 허전함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때와 같은 두근거림이 남았다.

"…안녕."

단테는 결국 별 말을 찾지 못하고 그와 같은 인사를 건넸다. 버질은 자신의 손을 피하지 않고 얽혀진 단테의 손을 잠시 내려보다, 다시 눈을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심장을 두드리는 미소가 주는, 기분 좋은 옛날의 설레는 감정이 스쳤다. 버질이 말을 꺼내려는 듯이 입을 연 순간,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단테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고, 버질은 그보다 한 박자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찾아줘서 고마워요. 보시는 것처럼, 무사히 잘 되고 있어요."

캣은 버질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했고, 버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되돌려 주었다. 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버질의 대답을 들은 캣은 뒤늦게 서로를 잡고 있는 두 손을 보곤 말을 아끼려는듯 애인과 함께 물러났다.

"즐기다 가시길 바라요. 덕분에 매상도 오르겠네."

"도움이 된다면야."

단테는 웃으며 돌아 사라지는 캣을 보다, 다시 버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바라보고 있던 그의 맞물리는 시선이 심장을 쥔 것처럼 아찔하게 느껴졌다. 단테는 저도 모르게 열이 올라 붉어진 제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단테는 잠시 헛기침을 한 뒤, 입술을 열었다.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어."

"이 지역이 넓은 편은 아니지."

단테는 그의 똑부러지는 말버릇을 좋아했다. 억양없이 자연스러운 클래식처럼 이어지는 그의 말소리도 좋아했다. 선곡을 시작하면 어깨에 얹혀지는 따뜻한 숨결과, 허리를 가볍게 감싸오는 따뜻한 손과, 이어지는 곡을 따라서 음이 낮은 건반을 누르며 화음을 쌓아올리는 그의 버릇도 좋아했다. 기실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는데. 움찔하며 멀어지려는 손을 단단히 잡아챈 뜨끈한 손과, 다시 이어지는 목소리가 단테를 매료시켰다.

"예전부터 그랬지. 나는 네가 피아노를 치는게 좋아."

"그래, 기억나네."

그리고 넌 그 말을 하고나서 나한테 키스했었지. 단테는 떠오르는 기억을 억지로 숨겼다.

"너도 그런 내가 좋다고 했었고."

단테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는 네가 피아노를 치는게 좋아.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그의 얼굴이 행복한 감정을 가득 담고 고백하던 그 때. 사랑에 빠진 얼굴의 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도 피아노 치는 날 좋아하는 네가 좋아. 낯부끄러운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 자신을 어르고 달래어 부드럽게 입을 맞추던 그가 사랑스러웠다면. 단테는 스테이지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물을 마시고 쉬다 돌아온 보컬이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키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테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난 이제 가야할 것 같은데."

"그래, 가야지. 이 손으로 다시 연주할거니까."

예전의 버릇처럼, 오래된 기억의 끝자락이 다시 펼쳐진 것처럼, 버질은 단테의 손을 끌어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감고 손등에 키스를 내리는 그의 모습에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다가왔다. 단테는 미친 것처럼 몸 속을 끝없이 채우는 심장소리가 밖으로 빠져나올까, 입술을 꾹 다물고 순순히 제 손을 놔주며 미소를 짓는 버질의 시선을 피했다. 귀끝이 빨갛게 물든 단테를 보며 버질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끌어 제 두 손을 겹친 단테가 버질을 지나쳐 스테이지로 향했다. 슬쩍 돌아본 시선에는 여전히 행복한 얼굴의 그가 걸렸다. 3년동안 곁눈으로도 마주하지 않았던 그 공백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옛날과 다를 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펼쳐지는 행복을 보며, 단테는 입술이 닿았던 제 손등을 슬쩍 다른 손으로 감싸쥐었다. 넌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기억해, 나는 잘 모르겠어, 이렇게 행복했는데 왜 우리가 헤어졌을까.





​이미 한 번 사랑했던 사람과 다시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을 무엇으로 일컬어야 하나.